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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눈동자

2025

지난 몇 년간 찍어온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진들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 있는가. 여기저기서 모은 도시의 흔적들이 내 방에 말없이 누워있다. 나는 별개로 보이는 사진들을 하나로 엮어내야 한다는 강박을 아주 옅게, 오래도록 지니고 다녔다. 밤거리의 닭과 돼지 냄새 사이로 퍼지는 담배 연기처럼.

어느 날 집 근처를 걷다가 도로에서 눌려 죽은 비둘기를 발견했다. 고독사한 사람이 부패하고 나서야 발견된 것처럼 금파리 무리만이 숨을 거둔 비둘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메이저리그 투수 랜디 존슨이 던진 공에 비둘기가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처럼 산화한 사건이 떠올랐다. 또 88올림픽 개막식 때 성화대에 앉아 있던 흰 비둘기들이 타오르는 성화를 피하지 못하고 타버린 영상도 눈앞을 스쳤다. 평화를 상징한다는 좋은 명분을 가진 비둘기는 우리나라에서 88올림픽, 대통령 취임식 등 여러 행사 때마다 몇천 마리씩 하늘로 날려 보내진 이후로 지금은 개체 수가 약 100만 마리 이상으로 급증했다고 한다. 날아간 평화들은 끈질기게 살아내고 버티다가 이유 없이 맞아 죽고, 쉬고 있다가 타 죽고, 먹이에 몰두하다 밟혀 죽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낯익은 기운이 감돌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거기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 사회로부터 이러저러한 상징을 부여받고 날려 보내진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꿈을 꾸다 새어나오는 쓴맛에 방향을 잃은 표정, 온 힘을 들여 무언가를 찾지만 끝까지 찾을 수 없는 손짓, 가린 얼굴, 가려진 눈빛의 사람들이 이름 없는 비둘기들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길거리 음식을 파는 번화가나 공원에서 비둘기가 걸어 다니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다가 비둘기들의 힘찬 날갯짓이 시작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면 도시에는 인간만 살고 있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결국 도시는, 무엇을 욕망하는지조차 모른 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생명체의 거대한 사냥터였다.

서울에 산 지 8년이 넘었는데도 노들섬을 최근에야 처음 가 봤다. 서울에서 어디론가 갈 때면 KTX를 타고 항상 건너던 한강철교를 밖에서 바라보니 생경했다. '안에서 보는 모습이랑 밖에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르네'하고 감탄했다. 한껏 무거워진 구름을 뒤편에 깔고 눅눅한 햇빛을 머금은 63빌딩을 바라보는데 제비가 총총거리며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서울에서 제비를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희미했다. 그래서 더욱 이리저리 움직이며 셔터를 눌렀지만, 사진 속의 제비는 방금 씻고 나온 것처럼 너무 깨끗했다. 날갯짓은 그들이 머문 자리에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을 것처럼 산뜻했다. 이렇게는 사진에 잔상과 냄새가 배어들 틈이 없겠다 싶어서 제비 찍기는 그만두었다.

사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대학생 시절 잠시 몸담았던 영화학회 활동이 지금도 내 마음에서 멈추지 않고 떠오른다. 당시 학회를 이끌던 선배는 매주 모임 때마다 각자 찍어 온 사진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한 편의 이야기로 엮어보라고 했다. 배치가 끝나면 각각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말하고 다른 학회원들은 '나는 이렇게 배치하는 게 더 좋겠다'고 의견을 주기도 했다. 다들 관점은 달랐지만, 말이 되는 쪽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익숙한 대로 배치하는 건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영화라고 해서 반드시 선형적인 순서로 서사를 구성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사진의 서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오랜 고민의 결과를 엮어 내놓는다.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힘들여 얻은 사진들이 너무나 쉽게 찍힌 사진에 밀려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실패가 목적이 된 사람처럼 더욱 시간을 들였다. 헛된 줄 알았던 발걸음들이 결국 길 위에 흔적으로 남을 때까지, 나는 계속할 수 있어 기쁘다.

The Faceless

2022

'거리 사진(Street Photography)'에 대해 사진가들이 쓴 글들 중 자주 보이는 주제는 '낯선 사람을 찍을 때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많은 거리 사진가들이 공공장소에서 어떻게 하면 초상권을 고려하지 않고 찍을지 고민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 방법은 초상권에 대해 법적으로 관대한 나라, 즉 미국을 포함해 몇 안 되는 국가를 중심으로 논의된다.

나는 사진기자로 일하면서 초상권 침해로 여러 번 사진 삭제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이후 나는 거리에서 인간의 초상 외에 다른 것들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The Faceless>는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고 찰나를 포착하는 거리 사진의 전형에서 벗어나 주위를 맴돌며 거리사진의 새로운 형태를 질문하는 작업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욕망이 휘감아 치는 도시를 좋아하는 나는 여전히 사람의 흔적을 좇는다. 그러나 카프카의 <성>에 마오는 측량사처럼 누군가를 실제로는 대면하지 못하고 헤맨다. 나는 복제물(포스터, 마네킹 등)의 복제물(사진)을 만들 뿐이고 실제로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존재는 동물들이다.

'Faceless'는 '얼굴 없는'이라는 뜻 외에 '정체불명', '특징 없는'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아무리 도시를 방랑해도 끝내 알 수 없는,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지나치고 마는 무언가가 있다. 나는 이것들에 특징을 부여할 수 있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

Shades of Blue

2016

내 방엔 50여 권의 사진집이 있다. 크기와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서로의 몸을 의지하며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이따금 사진집 한 권을 꺼내 펼쳐본다. 나는 매번 그 책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경이로움에 빠지곤 한다. 사진집의 첫 번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사라진다. 그러므로 생각도, 비판도 할 수 없다. 어느새 사진가의 눈과 카메라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인식한 현실에는 없지만, 그의 현실에는 굳건히 존재하는 것들을 거기에선 볼 수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을 때면 사진가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들여다보고 온 것만 같다.

다 본 사진집을 제자리에 놓으면서 나의 사진집이 그 옆에 놓인 모습을 여러 번 상상했다. 온라인으로만 사진을 공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누구나 손으로 여닫을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오래 걸으며 작업한 사진들을 보면서 어렵지 않게 사진집 제목을 정할 수 있었다. 특정한 주제 없이 7년여간 거리를 배회했던 내 안의 무의식은 이미 제목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제목이 의식의 수면으로 떠올랐으니 거꾸로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Shades of Blue>의 'Blue'는 단연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에서 나왔으리라. 이 앨범을 시작으로 나는 'Blue'가 재즈와 깊은 연이 있는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즉흥적인 화성의 변주로 연주할 때마다 다른 곡을 빚어내는 재즈뮤지션들을 존경했다.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 만나 빛과 그림자로 새롭게 조명되는 순간을 찍는 건 재즈와 같아서 언제나 놀라웠다. 집에 돌아와서 찍었던 사진을 바라보고 편집하는 동안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걸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언제 들어도 훌륭한 재즈의 리프는 사진을 이성이 아닌 직관으로 바라보라는 조언이자 응원이었다.

Blue는 재즈의 기원이 된 블루스를 뜻하고, 내 이름의 일부이기도 하다. <Shades of Blue>는 '파랑의 미묘한 차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바라보는 방식의 미묘한 차이들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무엇을 찍을지 생각하지 않고 거리로 나설 때 마주치는 시간과 형상은 변주를 거듭하며 나를 기대하게 한다. 목적지 없는 방랑 속에서 일관된 나의 시선을 발견할 때 기쁨을 느낀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사진의 정답을 찾을 수 없길 소망한다.

불온전 전주

2015

난 전주가 고향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전주의 지명은 온전한 도시에서 유래됐다고 수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카메라를 든지 얼마되지 않았던 나는 전주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며 불온전한 날을 보내고 있었다. 뭘 찍어야하는지도 명확히 알지 못했다. 눈이 멈추는 곳을 찍었다. 흔들리고, 수평도 안 맞고, 초점은 빗나가고…

그런데 지치지 않았다. 가끔 올라가던 서울에 비해서는 볼 것도, 경험할 것도 없었던 전주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풍경을 마주하며 다르게 보는 방법이 몸에 스몄다.

사진은 시간의 더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동안 10년을 넘게 쳐다보지 않았던 불온전한 전주 사진을 사진을 정리하며 보게 됐다. 지난 날의 실력이 부끄러워 덮어두었던 사진들이 세월의 은총을 받고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눈동자

2025

지난 몇 년간 찍어온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이 사진들은 무엇을 보여주기 위해 여기 있는가. 여기 저기서 모은 도시의 흔적들이 내 방에 말없이 누워있다. 나는 별개로 보이는 사진들을 하나로 엮어내야 한다는 강박을 아주 옅게, 오래도록 지니고 다녔다. 밤거리에 떠도는 닭과 돼지의 냄새 속에 퍼지는 담배 연기처럼.

어느 날 집 근처를 걷다가 도로에서 눌려 죽은 비둘기를 발견했다. 고독사한 사람이 부패하고 나서야 발견된 것처럼 금파리 무리만이 숨을 거둔 비둘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메이저리그 투수 랜디 존슨이 던진 공에 비둘기가 바람에 흩어지는 나뭇잎처럼 산화한 사건이 떠올랐다. 또 서울 올림픽 개막식 때 성화대에 앉아 있던 흰 비둘기들이 타오르는 성화를 피하지 못하고 타버린 영상도 뇌리를 스쳤다. 평화를 상징한다는 좋은 명분을 가진 비둘기는 1988년 대통령 취임식 이후 대규모 행사 때마다 수천 마리씩 하늘로 날려 보내진 이후로 지금은 개체 수가 약 100만 마리 이상으로 급증했다고 한다. 날아간 평화들은 끈질기게 살아내고 버티다가 이유 없이 맞아 죽고, 쉬고 있다가 타 죽고, 먹이에 몰두하다 밟혀 죽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낯익은 기운이 감돌아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거기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 사회로부터 이러저러한 상징을 부여받고 날려 보내진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꿈을 꾸다 새어 나오는 쓴맛에 방향을 잃은 표정, 온 힘을 들여 무언가를 찾지만 끝까지 찾을 수 없는 손짓, 가려진 눈빛의 사람들이 이름 없는 비둘기들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길거리 음식을 파는 번화가나 공원에서 비둘기가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하다가 비둘기들의 힘찬 날갯짓이 시작되면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러면 도시에는 인간들만 살고 있지 않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결국 도시는, 무엇을 욕망하는지조차 모른 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든 생명체의 거대한 사냥터였다.

서울에 산 지 9년이 넘었는데도 노들섬을 최근에야 처음 가 봤다. 서울에서 어디론가 갈 때면 KTX를 타고 항상 건너던 한강철교를 밖에서 바라보니 생경했다. ‘안에서 보는 모습이랑 밖에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르네’하고 감탄했다. 한껏 무거워진 구름을 뒤편에 깔고 눅눅한 햇빛을 머금은 63빌딩을 바라보는데 제비가 총총거리며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서울에서 제비를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봤지만 희미했다. 그래서 더욱 이리저리 움직이며 셔터를 눌렀지만, 사진 속의 제비는 방금 씻고 나온 것처럼 너무 깨끗했다. 날갯짓은 그들이 머문 자리에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을 것처럼 산뜻했다. 이렇게는 사진에 잔상과 냄새가 배어들 틈이 없겠다 싶어서 제비 찍기는 그만두었다.

사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대학생 시절 잠시 몸담았던 영화학회 활동이 지금도 내 마음에서 멈추지 않고 떠오른다. 당시 학회를 이끌던 선배는 매주 모임 때마다 각자 찍어 온 사진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한 편의 내러티브로 엮어보라고 했다. 배치가 끝나면 각각 자신의 내러티브에 대해 말하고 다른 학회원들은 ‘나는 이렇게 배치하는 게 더 좋겠다’고 의견을 주기도 했다. 다들 관점은 달랐지만, 말이 되는 쪽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익숙한 대로 배치하는 건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화라고 해서 반드시 선형적인 순서로 서사를 구성할 필요는 없었지만,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사진의 서사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오랜 고민의 결과를 엮어 내놓는다. 사진을 찍으면 찍을수록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힘들여 얻은 사진들이 너무나 쉽게 찍힌 사진에 밀려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실패가 목적이 된 사람처럼 더욱 시간을 들였다. 헛된 줄 알았던 발걸음들이 결국 길 위에 흔적으로 남을 때까지, 나는 계속할 수 있어 기쁘다.

Shades of Blue

2016

내 방엔 50여 권의 사진집이 있다. 크기와 내용은 모두 다르지만, 서로의 몸을 의 지하며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이따금 사진집 한 권을 꺼내 펼쳐본다. 나는 매번 그 책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경이로움에 빠지곤 한다. 사진집의 첫 번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사라진다. 그러므로 생각도, 비판도 할 수 없다. 어느새 사진가의 눈과 카메라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내가 인식한 현실에는 없지만, 그의 현실에는 굳건히 존재하는 것들을 거기에선 볼 수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을 덮을 때면 사진가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들여다보고 온 것만 같다.

다 본 사진집을 제자리에 놓으면서 나의 사진집이 그 옆에 놓인 모습을 여러 번 상상했다. 온라인으로만 사진을 공유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누구나 손으로 여닫을 수 있는 하나의 작은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 오래 걸으며 작업 한 사진들을 보면서 어렵지 않게 사진집 제목을 정할 수 있었다. 특정한 주제 없이 7 년여간 거리를 배회했던 내 안의 무의식은 이미 제목을 알고 있는 듯했다. 제목이 의 식의 수면으로 떠올랐으니 거꾸로 따라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Shade of Blue〉의 ‘Blue’는 단연 마일스 데이비스의 〈Kind of Blue〉에서 나왔으리라. 이 앨범을 시작으 로 나는 ‘Blue’가 재즈와 깊은 연이 있는 단어임을 알게 되었다.

즉흥적인 화성의 변주로 연주할 때마다 다른 곡을 빚어내는 재즈뮤지션들을 존경 했다.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 만나 빛과 그림자로 새롭게 조명되는 순간을 찍는 건 재 즈와 같아서 언제나 놀라웠다. 집에 돌아와서 찍었던 사진을 바라보고 편집하는 동안 재즈 플레이리스트를 걸어놓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언제 들어도 훌륭한 재즈의 리프는 사진을 이성이 아닌 직관으로 바라보라는 조언이자 응원이었다.

Blue는 재즈의 기원이 된 블루스를 뜻하고, 내 이름의 일부이기도 하다. 〈Shade of Blue〉는 ‘파랑의 미묘한 차이들’이라 할 수 있는데 내가 바라보는 방식의 미묘한 차이들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무엇을 찍을지 생각하지 않고 거리로 나설 때 마주치는 시간과 형상은 변주를 거듭하며 나를 기대하게 한다. 목적지 없는 방랑 속에서 일관된 나의 시선을 발견할 때 기쁨을 느낀다.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사진의 정답을 찾을 수 없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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